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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C.M.I 2007-11-26 15:56:49 | 조회 : 4583
제      목  중국 최초의 미인계 스파이 - 서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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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華三川 作 - 서시완사(西施浣紗)>
沈魚落雁,  물고기는 물속으로 가라앉고, 기러기는 땅밑으로 떨어지며,
閉月羞花,  달은 구름뒤로 얼굴을 가리고, 꽃은 스스로 부끄러워 하노라.


왕소군, 초선, 양귀비와 더불어 중국의 4대미인 중의 한 사람인 서시(西施)는 춘추전국시기에 월(越)나라의 저라산(苧蘿山) 기슭(지금의 절강 제기시) 의 한 농촌에서 태어났으며, 이름은 이광(夷光)이다.
어릴 때부터 천성이 곱고 용모가 아름다워 항상 마을 사람들의 부러움을 샀다고 한다.
하루는 서시가 강가에서 빨래를 하고 있는데, 그녀의 아름다운 모습이 맑은 강물에 비쳤다. 이때 물고기가 물에 비친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에 도취되어 헤엄치는 것도 잊어 버리고 구경하다가 점점 강바닥으로 가라앉았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서시를 '침어(沈魚: 미모가 너무나 아름다워 그것을 감상하던 물고기를 강밑으로 가라앉게 했다는 의미임)'라고 하게 되었다.

또 ≪장자≫에도 그녀의 미모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어느날 서시가 마음 속의 근심으로 인해 자신도 모르게 이마를 찌푸리며 마을을 걷고 있었다. 이마를 찌푸려도 여전히 아름다운 서시의 모습을 보고, 이 마을의 추녀가 자기도 서시처럼 하면 아름다워 보일까 하여 얼굴을 잔뜩 지푸린 채 걸어갔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은 이 추녀의 모습을 보고 모두 고개를 돌려 외면하고는 황급히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잠그고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오(吳)나라와 월(越)나라의 전쟁 중에 모국인 월나라가 위기에 처하자, 서시는 적국 군왕 부차(夫差)를 유혹하기 위한 정치적 임무를 지고 부차의 애첩이 되어 그 목적을 달성함으로써, 중국역사상 가장 유명한 미인계의 주인공이 된다.
춘추시대 후기 제후들의 쟁패의 중심은 장강(長江) 유역 하류와 절강 지역으로 옮겨진다. 이에 이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키워가고 있던 오나라와 월나라는 끊임없는 전쟁의 소용돌이에 빠져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된다. 월나라는 하(夏)나라 우(禹)임금의 후손이고, 오나라는 주(周)왕실의 속국이었다. 오왕(吳王) 합려(闔閭)의 통치 시기에 오나라는 초(楚)나라에서 귀순한 대신 오자서(伍子胥)와 유명한 병법가 손무(孫武)의 보좌로 국력이 강성해졌다. 이에 초나라를 공격하여 대파하고 승리를 눈앞에 둔 순간 월나라의 공격을 받아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주(周) 경왕(敬王) 24년 구천(勾踐)이 월나라 왕에 즉위했다. 오왕 합려는 이때를 틈타 월나라를 공격하여 지난날의 원한을 갚고자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오왕 합려는 부상을 입어 결국 죽게 되었으며, 그때 그는 아들 부차(扶差)에게 반드시 월나라를 평정하여 원수를 갚아달라는 유언을 남긴다.

오나라 왕에 오른 부차는 한시도 아버지의 원한을 잊지 않고 "땔나무 섶에 누워자면서(臥薪)"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때가 되어 부차는 필사의 각오로 월나라를 공격하여 구천의 군대를 대파하고, 회계산(會稽山)에서 월왕 구천을 사로잡는데 성공하였다. 이에 구천은 대부 문종(文種)과 범려(范蠡)의 건의를 받아들여 미녀 8명과 금은보화를 오나라 태재(太宰) 백비(伯噽)에게 보내어 매수하고, 오왕 부차에게 화의를 주선주도록 청하였다. 결국 화의는 성사되고 약정에 따라 구천은 오나라의 신하가 되었다. 구천은 겉으로는 오나라를 섬기면서도 안으로는 내실을 다지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경주하였다. 직접 농사를 지으면서 백성들을 독려하고 인재를 널리 모집하는 등 월나라를 부흥시키기 위한 각종 조치들을 취했다. 그러면서도 항상 부차에게 당한 치욕을 잊지 않기 위해서 쓸개를 걸어두고 그 맛을 보면서(嘗膽) 복수의 날을 기다렸다. 이때 구천은 부차를 안심시키기 위하여 매년 많은 금은보화와 미녀들을 예물로 바쳤는데, 서시도 그러한 목적으로 오왕 부차에게 바쳐진 미녀들 중의 한 사람이었다.
이때 월나라 대부 범려는 여러 차례 오나라에 미녀를 선사하였음에도 그 효과가 나타나지 않자 직접 전국 각지를 돌면서 절색의 미녀를 찾아 나섰다.

하루는 범려가 저라산(苧蘿山) 기슭에 이르렀는데, 약야계(若耶溪)라고 하는 곳에 두 명의 미녀가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 그 두 미녀는 바로 서시(西施)와 정단(鄭旦)이었다. 범려는 그녀들의 자태를 보자마자 아름다움에 도취되어 자신도 모르게 이렇게 말했다.

"조금만 더 다듬는다면 세상에 보기드문 보물이 되어 반드시 오왕 부차의 환심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월나라의 미래는 저 여인들에게 달려 있도다!"

범려는 그녀들을 만난 다음 자기의 신분을 밝히고 그가 오게 된 이유를 설명하였다. 서시와 정단은 무릎을 꿇어 절을 올리고, 연약한 시골 여자의 몸으로 이렇게 중요한 국가의 대사를 맡게 될 줄 몰랐다면서, 조국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것을다짐한다. 이에 범려는 회계산 부근에 비밀 장소를 마련하여 미인계를 성공시킬 계책을 체계적으로 준비해나갔다. 여기에는 서시와 정단 외에도 전국 각지에서 선발된 미녀 10여명이 더 있었는데, 교육 내용은 먼저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사상교육을 실시한 후, 그 다음으로 일반적인 지식을 전수하였다. 특히 가무(歌舞), 몸가짐, 예절과 사람을 유혹하는 기교 등을 중점적으로 지도하였으며, 정보수집 지식과 기술도 필수과목이었다. 이러한 집중적인 교육을 통하여 단기간에 그녀들은 충성심과 고귀한 품성을 갖춘 공작요원으로 양성되었다. 현대적 의미로 말한다면 서시는 바로 유명한 여자 스파이였던 것이다.

서시와 정단은 많은 스승들의 지도를 받으면서 발군의 재능을 나타내어, 3년만에 가무를 마스트하고 우아한 자태와 교태로운 정취를 뽐낼 수 있게 되었다. 월왕 구천은 이들을 시험한 후 대단히 만족하였다. 이에 범려는 날을 잡아 서시와 정단 등을 데리고 오나라로 향하였다. 그런데 어느새 범려는 서시와 사랑에 빠져 버렸고 서시도 임신을 한 몸인지라, 두 사람은 더 이상 헤어질 수 없는 사이가 되었다. 그러니 어떻게 이 배부른 미인을 오왕에게 바칠 수 있었겠는가? 오나라로 가는 도중에 가흥(嘉興)이라는 지방에 이르러 범려는 서시가 풍토에 적응을 하지 못한다는 것을 이유로 반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여기에서 서시는 범려의 아이를 낳았으나, 가련하게도 이 어린 생명은 부모에게 선택될 기회도 갖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범려와 서시는 국난으로 만났다가 국난으로 헤어지게 되었다.
일국의 대부(大夫)로서 자기가 진심으로 사람하는 사람을 보호하지도 못하고 그들의 사랑을 무정하게 버리고 말았으니 그 마음이 찢어질 듯 아팠고 더 이상 흘릴 눈물도 없었다. 드디어 범려는 서시 등을 데리고 고소대(姑蘇臺)에서 부차를 알현하고 그녀들을 선물로 바쳤다.

과연 오왕 부차는 오나라의 모든 미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서시와 정단을 보자 첫눈에 반하였다. 이때 오나라 태재 백비 등은 그 광경을 보고 매우 즐거워하였으나, 오나라의 상국(相國) 오자서(伍子胥)는 이를 못마땅하게 여기고, 넋이 나간 듯이 미인들을 바라보고 있는 부차에게 간언하였다.
"신이 듣기로 하(夏)나라는 말희 때문에 망하였고, 은나라는 달기 때문에, 주나라는 포사 때문에 망했다고 합니다. 미녀는 군주를 주색에 빠지게 해서 결국 나라를 망하게 하니 이들을 돌려보내야 합니다."
이러한 오자서의 간언에도 불구하고 부차는 이렇게 답하였다.
"나는 걸왕(桀王) 도 주왕(紂王)도 아니고 주(周)의 유왕(幽王)도 아니니, 오상국은 그렇게 걱정하지 않아도 되오."
그리고는 월나라에서 바친 미녀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부차는 그 중에서도 특히 서시를 좋아하였으며, 서시의 미모를 한없이 사랑하였다. 서시는 자신의 신분을 교묘하게 숨겼으며, 부차는 그러한 서시를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부차는 서시를 위하여 대규모 토목공사를 일으켜 영암산(靈巖山)에 화려한 관와궁(館娃宮)을 짓고 온갖 보석으로 호화롭게 장식하였다.

또 온갖 궁리 끝에 땅을 파서 큰 옹기를 묻어 평평하게 한 후 그 위를 다시 두꺼운 나무로 덮은 회랑을 만들게 하여 그것을 '향리랑(響履廊)'이라 하였다. 서시가 이 향리랑 위를 걸으갈 때 그녀의 발자국 소리가 영롱하게 울리도록 하기 위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인공호수를 조성하여 그 주위에 아름다운 화초를 심고 호수 안에서 배를 띄워 함께 놀 수 있도록 하였다.

서시와 정단의 갖은 애교는 부차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았으며, 이로써 부차는 정사를 돌보지 않고 그녀들과 함께 가무와 산수를 즐기는데만 열중하였다. 결국 부차는 범려의 계획대로 역대 망국의 군주들이 걸었던 길로 한걸음 한걸음 다가가고 있었다.

월왕 구천은 경거망동을 하지 않고 복수의 날만 기다리면서, 오나라가 대외 원정을 떠나 군사력을 소진 한 후에 오나라를 공격할 계획을 세워두고 있었다. 마침 서시로부터 오나라가 제(齊)나라를 공격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구천은 그때를 틈타 병력을 파견하여 오나라를 도우는 척 하면서 오왕 부차의 환심을 사 두었다.

그 결과 오나라는 제나라 정벌에 성공하였으나, 오나라 상국(相國) 오자서는 월나라마저 파멸시켜 후환을 없애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월나라에서도 이러한 오자서가 그들의 계획을 성사시키는 데 큰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였다.

결국 월나라에서는 이 오자서를 없앨 궁리를 하였다. 오자서의 제거 계획이 마련되자 그것은 서시의 임무가 되었다. 서시는 갖은 교태를 부리며 오왕 부차에게 오자서에 대한 험담을 하기 시작했다. 결국 부차는 서시의 말에 속아 오자서의 충정을 의심하게 되었다. 그래서 월나라 문제에 대한 토론 중에 의견 충돌이 일어나자 부차는 오자서에게 자살할 것을 명했다. 비분한 오자서는 두 손으로 자기의 두 눈을 파낸 다음, 부하에게 명하여 그가 죽은 후에 월나라 군대가 오나라 성을 쳐들어오는 것을 지켜보도록 그것을 성문밖에 걸어두라고 말했다. 이에 크게 노한 부차는 그를 잔인하게 찢어 가죽 주머니에 싸서 바다에 버리도록 했다. 오자서가 죽은 후 백비가 정사를 맡음으로써 오나라는 패망의 길을 재촉하게 되었다.

주(周) 경왕(敬王) 38년 가을, 오왕 부차는 제후들의 패자를 결정짓는 황지(黃池)의 회맹에 참가하기 위하여 직접 오나라의 정예병사를 이끌고 오나라를 떠났다. 이에 오나라의 도성은 텅비게 되었으며, 구천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오나라의 도성을 공격해 들어가 오나라 태자를 고소대(姑蘇臺)에서 불에 태워 죽였다. 4년 후 오나라에는 큰 가뭄이 들어 백성들은 기근에 시달렸다. 이때 구천은 다시 오나라를 공격하였으나 오나라 군대는 성을 지키기에만 급급하여 반격할 틈도 없었다.

주(周) 원왕(元王) 2년, 월왕 구천은 수군을 동원하여 오나라를 다시 공격하였다. 2년여에 걸친 포위 공격 끝에 결국 오나라 성은 무너지고 부차는 고소산(姑蘇山)으로 도망가 자결하였다.  그후 서시의 행방에 대해서는 전설적으로 전해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오왕 부차가 자결할 때, 오나라 사람들은 그들의 뜨거운 분노를 모두 서시에게 쏟아붓고 그녀를 비단으로 꽁꽁 묶어 양자강 가운데 빠뜨렸다고 한다. 그래서 ≪동파이물지(東坡異物志)≫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양자강에는 미인어(美人魚)가 있는데 서시어(西施魚)라고도 한다. 하루에 여러번 그 색깔을 바꾸며, 살이 부드럽고 맛이 좋다. 아녀자들이 그것을 먹으면 더욱 아름다워진다. 따라서 사람들은 그것을 서시의 화신이라고 한다."
이것은 다만 하나의 전설일 뿐 역사는 아니다. 역사적 기록에 의하면, 오나라가 멸망되는 날 범려는 고소대(姑蘇臺) 아래에서 옛날의 애인 서시를 찾아 황급히 태호(太湖)로 도망가서 그녀와 함께 일엽편주를 타고 아득한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고 한다. 범려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부귀영화를 버리고 이름을 숨긴 채 오호(五湖)를 유랑하면서 세상사를 잊고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냈다.

많은 세월이 지난 후, 산동(山東)에 도주공(陶朱公)이라는 이름을 가진 거부(巨富)가 나타났는데, 그의 아내는 꽃처럼 아름다웠으며 부부의 금슬도 아주 좋았다. 이 도주공이 바로 범려이고 그의 아내는 월나라의 미인 서시였던 것이다. 세월의 흐름을 따라서 그들에 관한 이야기도 점점 사람들의 머리에서 잊혀지자 더 이상 그들을 찾는 사람도 없었다.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서호(西湖)를 서시의 화신이라고도 말한다.




출처: 중국의 어제와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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